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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

진유y 2017. 12. 19. 21:10

도망치듯 집을 나와 카페에 갔다. 기운없이 구부정하게 팔을 늘어트리고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잔잔한 음악이 들렸다.

뭔가에 속은 기분이었다. 그게 입원했을 당시 곁을 지켜주던 손길에 뻗은 본능일지, 아님 유권 그 자신의 의사일지는 몰랐다. 허나 쿵쿵 뛰던 심장은 둘 중 무엇이 정답이든 상관 없다는 이기적인 눈치였다.

내가 끝까지 있어줄 수 있을까. 널 향해 심장이 뛰긴 하지만 아직 네 악(惡)을 품어낼 자신은 없다. 나는 경이처럼 불안정하지도 않고, 꼭 네가 옆에 있지 않아도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

'...아직은.'

너는 내게 비난을 곧잘 던진다. 말로는 한 적이 드물던가 없지만 눈빛으론 항상 질책한다. 다 알지도 못하고, 알면서도 아무것도 못하는 놈. 착한 척 하지만 사실은 제일 나쁜 놈.
하지만 억울하게나마 들어보일 것이 있다. 안대를 벗은 병실에 가장 크게 남던 존재감과, 신경이 곤두섰다고 핑계댄 상황 속 너를 향해버린 시선과, 무덤덤하게 올라만 가던 심박측정기의 숫자.
네가 얼마나 많은 마음으로 날 형용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너를 수식하는 건 이 세 가지 밖에 안 된다. 그래서 망설였던 거다.

"....."

그런데 그 세 가지가 너의 전부만큼 커지면, 그땐 나도 시작인 거잖아.

끄응 고개를 조아렸다. 제대로 빠지면, 못 나온다고 나는... 카페라떼 식는 김이 포르르 올라온다. 눈 가까이에 있는 뜨끈한 머그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차에, 그것이 스윽 멀어졌다. 역시 너였다.

"이거 좋아해?"

질문은 은근하게 다른 질문도 함유하고 있었다. 이대로 너를 알고 싶어해도 되냐. 더 가까이 가도 되는 거냐. 민혁은 생각에 잠겨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승낙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던 유권이 그처럼 똑같이 허리를 구부려 테이블에 볼을 뉘었다. 위아래가 바뀐 시야로 맑은 눈이 보였다.

"응?"

재차 묻는 소리를 냈다. 민혁은 스르륵 눈꺼풀을 내렸다. 유권은 깜빡이며 바라보는 것밖에 못 했다. 음악이 다 끝나갈 무렵, 조심스런 손길이 그의 머리에 올라왔다.

"이거랑, 아메리카노."
"....."
"술보단 커피를 더."
"....."

민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쓰다듬던 손을 테이블 위에 늘어뜨리고 편안히 기댔다.

"너도, 좋아."
"....."
"사실은."

각자 아래로 늘어뜨린 손은 테이블 밑에 하나씩 있었다. 민혁은 유권의 손을 찾아 잡고 살며시 새끼를 걸었다.

"나쁜 말 쓰지 마."

연구나 해봐야겠다. 욕의 독창적인 클래스를 보여주지.

"우지호가 시킨다고 다 들어주지 말고."

뭐든 말해라 지호야. 형이 다 해줄게.

"싸움도 하지 마. 너 하나 뜨면 환자가 몇이나 실려오는지 알아?"

.....

"그리고, 앞으로도 경이 잘 부탁하고."

.....

"나도 잘 부탁해."

친절한 미소엔 거절할 여력이 없다. 이러다 언제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목소리로 이별을 선고받더라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겠다. 참 질기도록 애매모호한 놈이다.

졌다는 듯이 웃어버리자 똑같은 소리가 가까이서 산들바람처럼 일었다. 어떤 마음이 고인 웅덩이에 잔잔히 물결을 일으켰다.







[1년 전.]





"김유권?"

태운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근 8시간만에 눈을 뗀 것이었다. 친구이자 경호원인 비서가 같은 대답을 반복하듯 무심히 눈을 꿈뻑였다. 예상 외의 방문객은 태운에게 집중에서 벗어날 가치가 있는 흥미거리였다.

"개새끼 무슨 일 있나..?"

그래봤자 용건은 지호일 게 뻔하다. 대충 그렇게 추측하곤 돌돌 손가락 위에서 돌리던 펜으로 읽고 있는 부분을 체크해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냐?"

연구원 가운을 펄럭이며 걸어와 텀블러를 든 손으로 응접실 문을 밀었다. 귀가 밝아 미리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있던 유권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먼 사이도 아닌데 꼭 이렇게 정중하다. 앉으라며 손을 들어보이고 맞은편 의자를 꺼냈다.

"2크루 일?"

위험한 거물을 상대하는 1크루가 대상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하는 마취제나 독극물을 개발, 제공하는 ZICO 2크루. 때문에 약물이나 해당 분야 문제로 카운슬링을 구할 때가 종종 있었다. 당연하게 그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유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린 듯한 미소가 여전히 은은한 상태였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태운은 입가에 막 닿으려던 텀블러를 정지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유권을 직시했다. 이건 정말로, 예상 외의 예상 외인데.




꺼낸 용건에 대답을 갖추려 되돌린 기억은 수년 전의 것이었다. 한 산간지역에서 일어난 의문의 폭발사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태운 자신에게도 빛바랠 만큼 오래된 일이었다. 대답을 하면서도 이걸 얘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와 함께 왜 물으러 왔는지가 꾸준히 궁금했다.
그나저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그때 그 형사는 좌천당했는데. 하나씩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니 유권은 점점 무언가를 확신하며 표정을 굳혔다. 긴 이야기를 마친 태운이 등받이에 기대 숨을 돌리며 커피를 마셨다. 들어올 땐 김이 나던 것이 이미 차갑게 식었다. 망설임없이 뚜껑을 열어 가까이 있던 정수기에 부어버렸다.

"너 좀... 이상하다?"

정부가 감춘 일을 어찌 알고 들쑤시려 하는지도 의아했고, 그의 질문에 '지호'란 단어가 포함되지 않는 경우도 처음이라 낯설었다. 생소한 상황이지만 주어진 모든 전말을 나열해봤을 때 가장 미심쩍은 건 역시 유권 스스로의 의지였다.

"왜 알고 싶어 하는 거야?"
"....."

질문에 대한 답은 평소와 같은 속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그냥 물음이 아닌 마제스티의 대답하라는 명령. 유권은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사무적인 표정을 닮아 목소리도 건조했다.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게 뭐냐고."
"개인적인 일을 망가뜨린 새끼가 있습니다."
"....."
"슬슬 꼬리를 찾아서. 조만간 족쳐버리려고요."
"...뭔데? 지훈이?"

그의 개인적인 일이란 가족이라고 하나뿐인 지훈 밖에 없다. 짚이는 걸 물었으나 유권은 대화를 하며 거두었던 미소를 다시 걸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속도가 평소보다 느렸다고, 태운은 생각했다.

"친구요."

처음에 듣고는 어디에 친구라는 이름의 조직이 있나 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보는 눈이 빙긋 휘었다. 어딘가 서글프고,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태운은 멍하니 앉아 놀람을 실감했다. 유권이 감추지 못하는 감정이 미묘하게 새어나온 것도 예사가 아니었다. 그걸 인지하니 갑자기 연장자로서의 의리인가 책임인가 비슷한 것이 샘솟았고, 이만 가보겠다는 그를 다시 앉히게까지 이르게 되었다. 자세한 건 모르면서도 어느새 제 눈빛은 맏형처럼 든든해져있었다.

"너 어디 아프냐?"
"....."

처음엔 그래 보입니까? 다음엔 아닌데요. 유권의 표정에 차례로 드러난 말이었다. 태운은 그럼 그렇지 넘기고선 골대에 농구공을 넣듯 툭 말을 던졌다.

"니새끼 죽어나가는 건, 아마 다 원인이 너일 거다."
"...?"
"울어 임마. 그렇게 참으면 병 나. 와 내가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하게 될 줄이야. 소름돋아..."

벅벅 양팔을 문지르는 태운을 유권은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멈추고, 그런 유권을 픽 비웃었다. 까불지 말고 쳐 울라는 듯 눈을 내리깔며 팔짱을 꼈다. 그는 인정하기 싫어할지 모르나 지호와 상당히 흡사한 표정이었다.

"여긴 너보다 어린 동생들도 없고, 네 상사도, 또 하사도, 동료도 없어."
"....."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게 곧 위기의 시발점이 되지. 우리 세상에선. 지호새낀 딴 건 안 그러다가도 경이 일로 빡돌면 아주 야차마냥 폭주해서 그 약점이 본의 아니게 묻혀버리지만, 너는 그럴 짬밥도 안 되잖아. 긴장 못 푸는 거, 뭐, 이해해."
"...저는 그런 게 아니라."
"그거도 병이다?"
"예?"
"지랄. 그거도 병이라고."

깝치지 말라고 말만 안 했지 아주 육포처럼 씹어먹을 기세다. 벙찐 얼굴이 가여워 한번 더 선심을 쓰기로 한 태운은 일어나 문밖의 사람들을 물렸다. 다시 돌아와서는 밀듯이 유권의 어깨를 쳤다. 힘이 강했는지 몸이 허했는지 의자에서 떨어질 뻔한 유권이 냉장고 앞에서 유유히 커피를 타는 태운을 멍하니 보았다.
무슨 심경을 읽은 것인지 가면처럼 쓰고 있던 미소띈 표정을 거두고 정색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됐다며 일어나자, 태운은 성가시다는 듯 눈매를 세웠다. 역시나 지호와 닮은 눈빛이었다.

"알아, 나. 네 입장."
"....."
"흔들리는 걸 보이면 안 되지. 의무적으로나... 이해타산적으로나."
"....."
"나도 한때 후계자 후보였던 사람이라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참고 있는지 짐작이 가. 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갈궈지진 않았어. 내 산증인이기도 하잖아 너. 개새끼 곁에 계속 있었으니."

태운은 앉은 채 눈만 들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유권은 기분 탓인지 그가 저를 내려다보는 것 같단 위압감이 들었다. 빙글빙글 텀블러를 흔드는 걸 보며 유권은 입을 다물었다.

"상사지만 너보다 어린 개새. 크루 리더지만 마찬가지로 너보다 어린 씹새. 집에 들어가도 나를 포함한 모두가 네 윗사람이니 어디서도 속마음을 꺼낼 수가 없었겠지. 가족이라고 하나 있는 게 씹새지만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이긴 어려울 거야. 걔는 단둘뿐이던 고아원생 시절부터 너를 동경했으니까. 줄줄 예찬하고 다니는 개새만큼이나."
"....."
"난 너보다 상사인데다 나이도 많고 또 네 고민거릴 이해 못할만큼 조상스런 노땅도 아니야. 울어도 돼. 너한테도 하나 숨구멍은 줘야지."
"....."

유권은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그가 낯설고 어려웠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는 그를 태운은 더 설득하지 않고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기선 괜찮아. 비록 집도 아니고 누구의 품도 아니지만."
"....."
"네 마음엔 들걸."

단조롭지만 평온한 말투는 유권의 몸에 보이지 않는 살얼음을 자자자작 둘렀다. 곧 냉동인간처럼 굳어, 어떤 가짜 미소도 짓지 못하고 혼자만의 정적에 휩싸였다. 유권은 잠시 그렇게 멍하니 서있었다.

"....."

얼음이 녹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떨어졌다. 내려보낸 주인의 눈도 낯설었는지 물줄기의 흐름이 불규칙하고 어색했다. 그러나 천천히, 꾸준히 더 솟아나와 턱까지 맺히길 반복했다. 태운은 무심한 표정으로 텀블러에서 올라오는 김을 불었다. 후, 작은 입김 소리는 유권에게 엄청난 강타로 변해 달려들었다. 뭐에 맞은 사람처럼 주륵주륵 울기 시작했다. 버틸 수 없을 지경이 됐을 땐 이미 한 손에 얼굴을 다 묻고 있었다.

"흐... 흑."
"....."
"아우욱....."

서 있기 힘든 사람이 억지로 버티고 있던 것처럼 다리가 풀렸다. 형편없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주저앉았다. 가슴을 뜯을 듯이 쥐고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자 태운은 약간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우지호는 모르나. 괜히 손목시계를 보았다가 다시 홀짝였다. 형이란 힘든거야...

"흐으... 흐으윽...."

유권은 그의 타격이 뒤늦게 고마웠다. 제 안에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었는지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밀려오지 못한 그 대신 깊게 고인 후회. 그 곰팡이 핀 악취. 만약 누군가 제게 사랑이 뭔지 묻는다면 멀뚱멀뚱 생각하다 썩은 물이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남은 게 그것 뿐이니.


그렇게 하루아침에 잃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갖고 싶으면서, 와주길 바라면서, 정작 제가 한 건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가슴 깊이 다짐하는데..



다음이 없습니다.



그게 무섭고, 아픕니다.

이성을 잃은 경이도, 그 앨 보며 아파하는 지호도, 억지로라도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행동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멀쩡한 척 하는 저만 멍청하게 멈춰있습니다. 미친듯이 울고 있는 지금도 사실 실감이 안 나서요.

"아윽...."

실감이 안 날 만큼 상실에 더딘 사람을, 저는 왜 더 많이 사랑하지 못했던 걸까요.


이 썩은 물이 제 안에 얼마나 깊은 멍울을 들게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만 울고, 더 흘려보내진 않을 겁니다.



이거, 그 사람이 준 거라서요.







한번 잃는 경험을 하고 나니 불쑥 용기가 솟았다. 그래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하더라도 저돌적으로 들이댈 수 있었다. 고여오기만 애타게 기다리던 물이 누군가의 발에 처참하게 짓밟혀 버렸으니. 자신의 것이 되기를 바라온 것이 첨벙첨벙 사방으로 튀어 흙바닥에 말라붙어가는 광경을 보는 건 생각보다 깊고 길게 가슴을 찢어놓았다.
만약 민혁에게 거절당한다 해도 다시 혼자 마음에 품을 각오는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잃지만 않으면. 가끔 볼 수만 있으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어도 좋아. 그 각오가 먹혔는지 날개를 다친 천사는 기적처럼 나타나 제게 눈길을 주었다.
망설이는 거, 이해한다. 정착하기엔 시간이 필요하단 거, 나라도 그러겠다.

밀려오고, 멀어진다.

어느 날은 내게 고여라. 그러다 아닌가 싶으면 유유히 돌아가.

너는 그마저도 아름다우니, 다시 기다리는 동안 난 반짝임을 간직할 수 있어.

[너라는 증거가 백 개나 있어. 빨리 와서 진술해.]

"끈질기기는... "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쾌한 손놀림으로 답장했다.

[나 아니라니까요, 경찰관님?]
[너 맞다니깐요? 여기 지금 너 얼굴 기억하는 목격자가 얼마나 많이 와 있는데.]

[당장 와라?]

[어쭈. 씹지?]

[야 김유권.]

[야!]

생글생글 웃으며 복도를 지나자, 막 스파이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직원들이 멍하니 그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복권 사야 하나."

오자마자 본 게 그 귀하다는 얼굴 TOP 3라니. 한참을 그곳에서 서성이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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